어제는 좀 이상한 하루였어. 아침부터 흐린 날씨라 그런지 기분도 끌려들어가는 듯했고, 점심은 그냥 냉장고에 있던 김치찌개를 데워 먹었는데, 맛이 너무 익숙해서 속이 쓰렸다. 그깟 뚜껑 열기 하나에도 지쳐서 커피 마시기 싫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옛날 사진을 보게 되더라고. 어릴 적 캠핑장에서 찍은 사진인데, 내가 파란 패딩 입고 얼굴만 나온 거. 그때는 왜 이렇게 웃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그 웃음이 정말 가벼웠다는 게 느껴져서 서늘해졌어.
그리고 그 순간, 그 사람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어. 예전에 한 번만 만났던 파트너. 다섯 살 차이 나는 남자였고, 내 연애 인생에서 가장 오래 걸린 관계 중 하나였지. 처음엔 서로가 ‘비슷한 것 같아’라는 말로 시작됐고, 첫 만남은 음악회였어. 우리 둘 다 클래식 좋아하는 거 알았거든. 그때 그 남자는 제복처럼 고급스러운 셔츠에 베레모를 쓰고 있었고, 나는 털목도리 하나 두르고 앉아 있었다. 그 시절엔 모든 게 조용하고 단단했던 것 같아. 감정이 터지는 건 아니었지만, 무언가 확신 같은 게 있었어.
그 사람은 원래 목소리가 조금 깊은 편이었고, 말할 때는 눈을 자주 감았다. 근데 그게 진짜 담백하게 들렸어. 대화 중에 불안한 부분 생기면 “잠깐만” 하고 말하고, 몇 초 멈추면 다시 시작하더라. 그 행동 하나하나가 지금 생각하면 정교하게 계산된 건 아니었겠지만, 그때는 그게 내게는 특별한 친밀감이었어. 우리가 함께 시간 보내는 동안은 항상 ‘내가 이 사람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 자체가 위로가 됐었지.
하지만 결국은 헤어졌어. 전부 다 이유는 아니었지만, 내가 도망치듯 떠난 게 큰 요인이었어. 사실 그때는 내 삶이 너무 복잡했고, 그 사람에게도 그런 감정을 줄 수 없었거든. 그래서 말없이 사라졌고, 그 후로 거의 3년 동안 연락도 없었어. 물론 메일 주소는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걸 왜 쓰는지조차 모르겠었어.
오늘은 그 사람이 갑자기 내 메일함에 메일을 보냈어. 아주 짧은 문장이었는데:
“최근에 자주 회상되는 사람이 있어서.”
문장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흔들렸어. 그리고 그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10분 정도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었다. 그 후로 반쯤은 무시하고 싶었지만, 또 반쯤은 답하고 싶은 감정이 섞여서 결국 ‘응, 나도 너 생각 많이 했어’라고 답했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우리는 서울의 한 카페에서 다시 만났어. 그 사람도 변했더라. 나이는 더 들었지만, 그보다 더 크게 달라진 건 눈빛이었어. 그땐 꼭 맞는 관계를 이루려는 듯한 눈빛이었는데, 이번엔 오히려 ‘나를 놓아주는’ 그런 태도였어. 말투도 더 부드러웠고, 질문은 던지기보다는 듣는 데 집중하는 느낌이었어. 그는 내가 지난 3년 동안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묻지도 않았고, 대신 “이번엔 네가 먼저 말해줘도 괜찮아”라고 말했어.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났어. 그만큼 평온한 분위기였던 거야.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예전과 비슷한 주제였지만, 이제는 서로의 ‘결국’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지금’을 공유하는 데 집중했어. 그는 내 과거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고, 나도 그의 과거를 알고 싶어 하지 않았어. 그냥 그 자리에서, 그 순간을 살고 싶었어.
그래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풀렸고, 그는 갑자기 뭐가 떠올랐는지 말했어. “이번엔 나도 좀 다르게 해보고 싶어서.” 그 말에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어. 아마도 그도 그랬겠지. 그동안 계속 내게 ‘완성’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건 아닌지. 그런데 이제는 그게 필요 없는 거였어.
그리고 나서 그는 조용히 말했어. “최근에 새롭게 써본 앱 있는데, 좀 다른 느낌이야. 네가 혹시 관심 있을까?”
그리고 그때였다. 내가 그 긴장감 속에서 갑자기 떠올린 게 있었어. “SM톡”이라는 앱 이름. 지난달에 누군가가 온라인 모임에서 언급하면서 “오픈채팅보다는 상황에 맞는 연결이 잘 돼서”라고 말했던 거야. 그건 내가 실제로 써본 적은 없었지만, 그말이 떠올라서 무심코 대답했어. “글쎄, 혹시 그 앱에서 만나셨어요?”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어. “응, 너랑 비슷한 분위기의 사람들을 만났어.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 중에 가장 자연스럽게 느껴졌거든.”
그 말을 듣고 나는 혼자서도 미소를 지었어. 그 말은, 우리가 다시 만나도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그간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했고, 그 변화가 이제는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는 걸 의미하니까. 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나를 ‘완성’시키려는 사람이 아니라, ‘같이 있는 것’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어.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서도 그 사람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어. 그때는 ‘우리’였던 게 아니라, ‘나’와 ‘너’였고, 그게 더 큰 위로가 됐다는 걸 알았어. 그리고 그 이후로 내 손끝이 스마트폰을 스와이프하는 걸 멈추지 못했어. 그 앱 이름이 또 한번 떠올랐고, 이번엔 그냥 지나치지 않고, 검색창에 “SM톡”이라고 입력했어. 그저 궁금해서. 그 앱이 얼마나 다른지, 그 사람이 말한 ‘자연스러움’이란 게 어떤 건지,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거든.
어쩌면 나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붙잡히고 싶지 않아. 하지만 또 한편으론, 이젠 내가 나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걸 느꼈어. 그 사람과의 재회는 결코 ‘다시 시작’이 아니었고, 그저 ‘그렇게 살아왔구나’를 다시 확인한 일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