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두려웠는데, 그 떨림이 내 안에서 시작된 순간

처음으로 롤플레이를 해봤을 때는 그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막막했고, 그 막막함이 오히려 더 두려웠다. 파트너와는 오래된 사이였고, 서로에 대해선 어느 정도 익숙한 편이었지만, 그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 “내가 말을 잘못하면 어쩌지? 나의 반응이 너무 무미건조하면 그거로 끝날 수도 있잖아”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정작 시작은 아주 평범한 상황에서 시작됐다. 집에서 영화 보다가, 갑자기 “오늘은 좀 다른 거 해볼까?”라고 말했던 게 계기가 됐다. 우리 둘 다 술도 안 마셨고, 긴장감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말 한마디에 무언가 틀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파트너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 혹시 내가 너를 잡아먹는 식으로 해보자고? 그냥 미친 악당 같은 역할이라도.”

나는 순간 눈이 번쩍 났다. 그런 걸 진짜 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고, 동시에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경각심, 흥분, 그리고 약간의 죄책감까지. 왜냐하면 그건 단순히 ‘즐기기 위한 장난’이 아니라, 우리가 이전까지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만들어가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날 밤, 나는 '피해자'였다. 벽에 매달린 상태로 손목과 발목이 끈으로 묶여 있었고, 파트너는 침대 옆에 서서 천천히 내 목을 스치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엔 살짝 유머러스했지만, 점점 더 차가워지고, 정확하게 지배적인 리듬을 잡았다. “넌 아무 말도 못 해. 네가 하려는 모든 선택은 나한테 달려 있어.” 그 말이 떨어질 때마다, 내 마음이 조용히 떨렸다. 아니, 떨린 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떨림이 내 안에서 사라지고, 대신 하나의 공허한 집중이 생겼다. 마치 세상이 줄어들고, 남은 건 그 사람의 목소리와, 내가 느끼는 몸의 무게뿐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불편했다. 밧줄의 긴장감, 목덜미 위로 스며드는 따뜻한 숨결, 그리고 완전히 주체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낯설어서. 하지만 곧 그 불편함이 ‘무엇인가’로 바뀌었다. 내가 아는 그 ‘나’가 조금씩 사라지고, 대신 어떤 다른 존재가 등장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나’가 아니라, ‘그녀’가 되었고, 그녀는 도망갈 수도 없고, 저항할 수도 없었으며, 그저 그 사람의 이야기 속에 흘러가는 물방울처럼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전부터 알고 있던 거였다. 나는 이런 걸 원했었고, 그걸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서 오랫동안 숨겨왔던 걸.

다시 말하자면, 롤플레이란 단순한 역할극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입만 바꾸는’ 게 아니라, 인식의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내가 경험한 건, 내 의식이 스스로를 ‘주체’에서 ‘수용자’로 바꾸는 그 충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진짜로 ‘부족한 자’가 되었고, 그래서 더 큰 쾌락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 부족함이 결코 괴로움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 후 며칠 동안 나는 계속 그 상황을 떠올렸다. 자주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 기억이 내 안에 살아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어, 문을 닫을 때마다 그 사람이 내 앞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옷을 입을 때마다 끈이 묶이는 느낌이 스며들었다. 그것이 일상 속으로 스며든 것이었다. 사실 그건 아직도 그렇다. 그 경험은 나를 완전히 바꾸진 않았지만, 내 안의 어떤 부분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것 같았다. 내가 뭘 원하는지, 어떻게 빛을 받고 싶은지, 그걸 더 잘 알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요즘, 내가 쓰는 앱 중 하나가 바로 'SM톡'인데, 그곳에서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담을 공유하고 있다. 오픈채팅은 너무 넓어서 허공에 떠 있는 느낌이었는데, 여기선 특정한 분위기와 관계를 나누는 사람들이 많아서 더 진솔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게 좋았다. 예를 들어, 내가 처음 롤플레이를 했을 때 느꼈던 혼란스러움이나, 그 후의 회복 과정에 대한 고민 같은 걸 실시간으로 나눌 수 있었고, 그걸 통해 내가 겪은 게 ‘정상’이라는 걸 알게 됐다. 물론, 어디에도 비밀은 없지만, 그만큼 믿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몰라. 그래서 이제는 그 앱에서 힌트를 얻기도 하고, 자신의 감정을 글로 풀어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물론, 직접 하는 건 여전히 소중하고, 그 순간은 아무것도 대체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경험을 말로 나누는 것, 그 자체가 또 다른 종류의 구속이자 자유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