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좀 이상한 하루였어. 아침부터 흐린 날씨라 그런지 기분도 무거웠고, 그냥 아무생각 없이 지하철을 타고 회사로 가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어. "아, 진짜… 이거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고개를 돌려보니까 그 사람이 서 있었다. 오랜만이야, 말은 안 했지만 얼굴은 거의 기억이 안 났어. 그때는 완전히 서로의 세계를 빼앗아가고 싶은, 그런 감정이 있었거든. 지금은 그게 다 사라졌고, 대신 눈에 보이는 건 그저 낯선 사람뿐이었어. 그런데 그 순간, 내가 그에게서 느꼈던 거는 순수한 ‘비밀’이었어.
그때는 내게 있어서 가장 강렬했던 경험 중 하나였어. 그때는 나도 모르게 몸을 다 주고, 마음까지 바쳤던 시기였고, 그는 나에게 정확히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줬던 사람. 아니, 오히려 나를 잃어버릴 뻔한 계기였던 사람도 맞았지. 그와 함께 한 시간들은 사실상 2년 정도였는데,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어떻게든 ‘무너질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싶었고, 그는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던 사람.
그런데 지금은 달라져 있었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미소는 내가 기억하는 그 미소랑 비슷했지만, 분위기가 달랐어. 그때는 웃음이 ‘통제’였고, 지금은 ‘자유’처럼 보였어. 그래서 나는 그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라고 물었고, 그는 “지금은 집중해서 살고 있어. 매일 조금씩, 그래도.”이라고 대답했어.
그 말을 듣고 나는 또 다른 생각이 들었어. 그때는 내가 완전히 그에게 의존하고 있었다고 생각해. 아니, 오히려 그가 내 모든 기준을 바꿔놓은 시기였잖아.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디에 가야 하는지… 모두 그가 결정했고, 나는 그걸 받아들여야만 했다. 지금은 그런 걸 느끼지 못했어. 그가 제시한 어떤 규칙도, 권위도 없었고, 그 자체가 너무 자연스럽게 보였어.
그리고 그때는 내가 참는 게 당연했고, 고통이 즐거움이었고, 그가 내게 던지는 질문이나 명령이 전부 의미 있는 것 같았어. 지금은 그건 아니다. 내가 어쨌든 선택할 수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그가 내게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제안’뿐이었고, 그것도 전혀 압박처럼 느껴지지 않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나에게 어떤 종류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예전엔 그의 눈빛이 바로 ‘내게로 오라’는 메시지였다면, 지금은 그저 ‘네가 여기 있구나’라는 침묵 같은 느낌이었어. 나는 그에게서 더 이상 ‘결정권’을 기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나에게 주는 무언가를 받는 게 아니라, 내가 그에게서 뭘 얻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
그 사이에 우리가 다시 만난 건 단순한 우연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그 순간, 정말로 깊은 감정을 느꼈다. 아니, 그보다는 ‘진실’을 느꼈다는 게 더 정확할까. 그가 지금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내가 그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 두 가지 모두가 예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내가 그를 필요로 했고, 그는 나를 필요로 했고, 그 사이에는 ‘조화’가 있었지만, 그 조화는 균형이 아니라, 서로를 흡수하는 관계였다.
지금은 그게 다 사라졌고, 대신 무엇인가가 남아 있었다. 평온함? 유대감? 아니면 그냥 친구 같은 거리감? 그건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데 부담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했어. “이렇게 만나서 좋았어. 네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정말 궁금했거든.”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도 너를 보니까, 괜찮아 보이더라.”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듣고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했다. 그때는 내가 그를 찾는 이유가 ‘왜냐하면 그가 나를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고, 지금은 내가 그를 찾아가는 이유가 ‘왜냐하면 그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니까’가 아니라, ‘왜냐하면 그가 나를 아는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더 컸어.
그 후 우리는 커피 한 잔을 마셨고, 그저 둘이서 맥주 한 병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걸로 끝났어.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논 것 같았지만, 어쩌면 그게 가장 중요한 대화였던 거 같아. 그런 말이 없다는 게, 오히려 더 큰 소리였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날 밤, 집에 와서 채팅 앱을 열었는데, 요즘 자주 쓰는 ‘SM톡’에서 갑자기 내 이름이 뜨더라고. 누군가가 내 프로필을 봤다고 알려주면서 ‘오늘 오후에 뭔가 재미있는 게 생길지도 몰라’라고 말했어. 그 글을 읽고 나는 그 순간, 오랜만에 예전 파트너를 만난 그 감정을 떠올렸어. 그때는 내가 그에게서 ‘나’를 잃고 싶었고, 지금은 내가 그에게서 ‘나’를 되찾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았어. 그리고 그게 다 중요하단 걸, 아마도 그 앱의 한 줄 한 줄이 나에게 말해주고 있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