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롤플레이에서 느낀 무너짐과 그 속에서 배운 진짜 소통의 법칙

처음 롤플레이를 해봤을 때는 정말 허공에 떠있는 기분이었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좀 무너진 기분이랄까. 그 전까지는 그냥 ‘플레이’라는 게 어떤 식으로든 몸과 마음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겠거니 하고 막연히 생각만 했는데, 실제로 해보니까 예상 밖의 감정이 쏟아져 나와서 당황스러웠어.

그때는 혼자서 플레이를 하기엔 너무 부담스럽다고 느꼈고, 누군가와 함께 해보는 게 좋겠다 싶어서 온라인에서 만난 파트너와 시도해봤어. 대화로는 꽤 친해졌고, 상대방이 도움이 되려는 태도도 진지해서 신뢰감은 있었어. 다만 난 처음부터 ‘내가 이거 진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시달렸고, 정작 만나기 전엔 별다른 준비도 없었거든. 대체 무슨 역할을 할지,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전혀 감이 안 왔어.

그런데 실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내가 제시한 설정이 너무 딱딱하고 뻣뻣해서 오히려 상대방도 어색해하는 모습을 보였어. 나는 ‘엄격한 교수님’이라는 설정을 들고 왔는데, 말투도 너무 강하게 붙잡고, 눈빛도 과장되게 다가가서 그런지 상대방이 웃음을 참으며 “이렇게 깐깐하긴 처음이에요”라고 말하더라고. 그 말을 듣고 나는 한순간 얼굴이 화끈해졌어. 자존심도 약간 상했지만, 동시에 ‘아, 이건 진짜로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어야 하는 거구나’라는 걸 알게 됐어.

그 이후로는 그냥 자기 자신을 벗어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반응을 더 살펴보는 걸 연습했어. 예를 들어, 내가 ‘교수님’이라고 말할 때마다 상대방의 표정이나 말투 변화를 관찰하면서, “이 정도면 충분히 설득력 있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조금씩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어. 결국은 단순한 역할극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만들어지는 공감과 유대감이 중요한 것 같다는 걸 깨달았어.

그리고 얼마 전에는 요즘 쓰고 있는 채팅 앱인 SM톡에서 만난 사람과 좀 더 긴 롤플레이를 해봤어. 오픈채팅 같은 곳에서는 뭔가 무질서한 느낌이 강했는데, SM톡은 분위기가 좀 다르더라고. 등록할 때 정보를 어느 정도 입력하게 되니까, 관심사나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연결되기 쉬웠고, 특히 쪽지를 통해 미리 설정을 조율할 수 있어서 손쉬웠어. 내가 원했던 ‘비밀스러운 저녁식사 장면’ 같은 걸 구현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고. 그 사람은 문장을 읊는 방식이 너무 자연스럽고, 감정을 전달하는 걸 잘해서 내가 진짜 ‘그 자리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어.

그날은 마무리하면서, 그 사람이 “이번엔 진짜 교수님 같은 분이었던 것 같아요”라고 말하더라고.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어. 내가 겉으로는 늘 조용하고 무뚝뚝한 사람인데, 사실은 그런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건지도 몰라. 그래서 롤플레이를 해보면서 얻은 건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이 조금씩 정리된 것 같아.

이제는 매번 새롭게 설정을 만들거나, 또 다른 역할을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어. 물론 여전히 긴장되긴 하지만, 그 긴장감이 이제는 ‘무엇을 잘못할까’보다는 ‘어떻게 더 깊이 들어가볼까’라는 기대감으로 바뀌고 있거든. 아무래도 혼자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경험인데,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만들어가는 순간들이 가장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됐어.

그 이후로는 좀 더 조심스럽게, 그래도 흔들리지 않게 움직이려고 했어. 처음엔 ‘내가 이정도면 충분히 진지하게 보일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그 다음엔 오히려 반대의 감정이 밀려왔어. 예를 들어, 내 설정이 너무 빡빡해져서 상대방이 뭔가 불편한 기색을 보일 때마다 ‘내가 과잉 플레이를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떠올랐고, 그때마다 스스로를 의심하게 됐지. 특히 그 사람과 대화할 때, 내가 너무 “역할”에 집착해서 진짜 나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걸 느꼈어.

그런데 한 번은 그 사람이 갑자기 “너 진짜 교수님이 아니라, 그냥 너였으면 좋겠어”라고 말했을 때, 그 순간 내 마음이 무너진 것 같았어. 정확히는, 나는 그저 ‘감정을 가두고 싶었던 나’였다는 걸 깨달았던 거야. 롤플레이를 하면서 숨겨왔던 감정들이, 사실은 역할 안에서만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거란 걸 알게 된 거지. 그건 분명한 성찰이었지만, 동시에 어색함과 죄책감까지 들었어. 내가 왜 그렇게 ‘제자’처럼 굴었는지, 왜 막연히 복종을 원했는지, 그건 내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시간을 비틀어 표현한 건 아닐까 싶기도 했거든.

그 이후로는 설계된 설정보다는, 상대방과의 공감 능력을 더 중요시하게 됐어. 예를 들어, 그 사람이 ‘미니멀한 테크니컬 직장인’ 같은 설정을 제안했을 때, 나는 “아, 이 사람은 외로움을 어떻게 견뎌냈을까”라는 생각을 먼저 했지. 그런 순간부터는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까’가 아니라 ‘이 사람과 함께 어떤 공간을 만들어낼까’가 중심이 됐어. 그래서 실제로 몇 차례 진행한 이후에는, 내가 정말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마치 내가 뭔가를 만들거나 장식하는 게 아니라, 단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의미가 되는 그런 순간이 생겼지.

요즘 쓰고 있는 채팅 앱인 SM톡에서도 그런 변화가 느껴져. 처음엔 그냥 ‘적합한 파트너’를 찾는 데 초점을 두었는데, 이제는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문장을 선택하는지, 그 배경에 어떤 감정이 있을지 고민하게 돼. 오픈채팅에서는 다들 급하게 정보를 주고받고,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니까 그럴 수 없었지만, SM톡은 메시지 전달이 조금 느리긴 해도 그만큼 각자의 말에 시간을 줄 수 있어.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풀리는 게 아니라, 말 한마디 하나가 결국엔 감정의 층위를 읽게 만드는 그런 경험이 생겼어.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처음에 내가 겁내며 시도했던 롤플레이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어. 그건 내가 누군가와 얼마나 깊이 연결될 수 있는지, 그리고 자기 자신을 얼마나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일이었지. 그때는 ‘역할’이 필요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역할’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그 안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 내가 누구인지, 혹은 누구로 보이고 싶은지가 아니라, 그 사이에 어떤 관계가 만들어지는지가 더 중요한 거란 걸.

그리고 매번 그렇듯, 이번엔 또 다른 설정을 준비 중이야. 이번엔 ‘예전에 떨어진 사이였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장면. 근데 이번엔 내가 주도하기보다는,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었을 때,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가 더 궁금해. 아마도 그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서먹하고, 조심스러울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다 좋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그 서먹함 속에서 진짜 말을 나누는 법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야.